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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욱.”
토시노리는 배를 틀어잡고 겨우 건물 사이의 작은 틈새로 들어가 주저앉았다. 아까부터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쓰러지면 안 되는데. 생각과는 달리 약해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결국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헛구역질을 몇 번 하다가 이내 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먹은 게 없는 몸에서는 위액밖에 나오지 않았다. 한참 신 위액을 토해내다가 겨우 토악질이 멎어 간신히 몸을 추슬러 일어서던 그는 다리가 풀리는 바람에 그가 토해낸 위액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젠장. 신 냄새에 코가 따가웠다. 일어나야 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끝이 떨릴 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손가락 끝이 떨리는 것도 감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쓰러지면서 손이 시야 안에 들어오는 위치에 놓여졌기에 보이는 것으로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취객으로 착각해서 경찰이라도 부르면 큰일인데. 생각하던 중에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괜찮으세요?”
앳된 목소리에 답하기도 전에 손이 그의 팔과 어깨를 붙들고 힘주어 일으켜 앉혔다. 차갑고 부드러운 것이 얼굴에 닿아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뺨에 느껴지는 감촉으로 보아 꽤 질이 좋은 손수건인 듯 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닦아 드릴 테니까.”
토시노리는 두려움 없는 목소리에 의아함을 띄었다. 히어로는 아니겠고 설마 그를 동경하는 누군가일까. 이제 눈 뜨셔도 괜찮아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뜬 그는 수줍게 웃고 있는 교복차림의 소년을 보고 놀라 눈을 깜박였다.
“괜찮으세요? 잘 안 보이시나요?”
“아니. 괜찮네. 소년.”
토시노리는 안도하여 숨을 몰아쉬는 소년의 모습에 한층 더 호기심을 느꼈다. 설마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일까. 상상하기 어려웠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압도적인 두려움으로 가능했다.
행여 그가 무슨 짓을 할까 차마 신고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피해가는 시민들. 시민들 뿐 아니라 그가 무언가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나서서 그를 체포한답시고 날뛰어 심기를 건드리려는 히어로도 없었다.
하지만 이 소년의 태도는 그런 비겁자들과는 달랐다. 그를 정말로 아는 거라면 담대함을 넘어 무모함이나 백치스러움에 가까울 정도로 평온한 태도였다.
“한 가지,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올마이트.”
역시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군. 토시노리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당신은 무개성인가요? 남들을 속인건가요?”
“저런. 처음부터 대단한 질문인걸. 하지만 속일 필요는 없는 질문이니 대답하지. 대답은 어느 쪽도 아니다, 겠군. 나는 분명 무개성이었지만 후에 개성을 손에 넣었다네. 소년.”
그렇군요. 그 믿을 수 없는 대답에 소년은 쉽게 수긍했다. 그러면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저런, 하나 더? 이것 참. 궁금한 게 많은 소년이로군. 그러면 무엇을 묻고 싶은 거지?
토시노리의 질문에 소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개성이 없어도, 히어로가 될 수 있나요?”
“대답은 당연히 No. 였지만 말이지.”
“그랬으니 지금 미도리야가 빌런이 된 거죠.”
아이자와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토시노리에게 얼음을 띄운 레모네이드를 건넸다. 고맙다는 짧은 답례와 함께 잔을 받아 빨대로 가볍게 한 모금을 빨았다.
“그거야 물론 그렇지. 하지만 아이자와 군, 정말 대단한 건.”
“올마이트!”
“오오, 미도리야 소년! 돌아왔나!”
무언가 말하려던 그는 현관에서 들려온 애제자이자 후계자인 소년의 목소리에 마시던 레모네이드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오늘은 어땠나?”
즐겁게 물어보는 목소리가 들리고 마찬가지로 해맑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즐거웠어요! 아이자와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신소 군, 오늘은 설득하는 데 실패했지만 분명 좋은 친구가 될 거예요! 들뜬 미도리야의 목소리가 거실까지 분명히 들려왔다.
역시, 신소도 이 쪽에 더 잘 맞는 거로군.
토시노리가 미도리야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는 아이자와를 데려온 이래 몇 번이고 한 이야기였다. 한 번만 들어도 잊을 수 없을 인상적인 이야기를 반복해 듣다보니 이젠 전문을 외워 읊을 수 있을 정도였다.
분명 미도리야는 그 다음에 ‘그러면 빌런은 될 수 있나요’하고 다시 물었다고 했다. 토시노리는 거기에 Yes라고 답했다. 그 대답만큼 진심이 넘치는 대답은 없었을 것이다. 토시노리 또한 무개성으로서 -지금은 개성을 후천적으로 손에 넣은 상태지만- 이 사회에 절망하고 빌런이 된 자이니까.
그는 무개성으로서 히어로를 꿈꾸었다. 그를 위해 몸을 단련하고 지식을 쌓으며 비록 일반과라지만 웅영고에 입학하기에 이르렀으나 이 사회에 절망했다.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개성이 무개성을 차별하고 무시하며 상처 입히는 것이 지나치게 당연히 여겨지는 사회였다. 그런 상태에서 토시노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히어로다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평가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좀 더 노력하면 된다고, 자신에게 맞는 장비를 이용해서 활동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무개성은 무얼 하건 간에 항상 무시당하고 평가절하당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좌절하기를 반복하던 야기 토시노리는, 마침내 그를 인정해 준 사람을 만나 그에게 개성을 넘겨받은 순간 사상 최흉의 빌런이 되었다.
‘분명 그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거야. 아이자와 군.’
좌절하고 절망하고 단념했다가 다시 일어서고 혐오하고 그러면서도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가 마침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 사회를 포기했다.
무개성의 소년이 그에게 빌런이 될 수 있느냐 물었을 때 토시노리는 그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는 사회를 환멸하기 시작했으면서도 그 감정을 표출할 수 없어 안에서부터 말라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토시노리는 그를 제자이자 후계자로 삼았다.
빌런으로서의 생활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설령 무개성이라 하더라도 충분한 악의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상처 입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악의에서 비롯된 작은 행동에 사회는 반응하고 변화한다.
선의로 사회를 바꾸고자 노력했을 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는 거기에 만족했다. 자신이 사회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고 그것을 실감할 수 있는 매일 매일이 즐거웠다. 그리고 부상으로 인해 장시간의 활동이 어려워져 후계자를 찾던 중 미도리야를 만났다.
과거의 그처럼 웅영고의 교복을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워 입은 채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은커녕 어딘가 피곤함과 공허함이 깃든 눈을 하고 있는 소년.
그를 후계자로 정한 뒤 토시노리는 그를 위해 노력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새로이 능력을 물려받은 미도리야의 교육을 위해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웅영고 재학 시절부터 이 사회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있던 아이자와를 포섭하기까지 했다.
아이자와는 미도리야를 위해 새로이 레모네이드 한 잔을 더 따르면서 씁쓸함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야기 토시노리가 빌런 올마이트가 된 뒤에도 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도리야 이즈쿠가 올마이트의 뒤를 이어 새로이 최악의 빌런이 되었다.
연쇄를 끊어 내려면 무개성이 사라지거나,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인식을 달리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이자와는 올마이트에게 신소와 만난 이야기를 하며 들어오는 미도리야에게 손부터 씻고 오라며 잔소리를 하는 것으로 입 압의 씁쓸함을 애써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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